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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을 등에 업은 노부부가 다투는 소리에 잠을 깬다. 아침부터 뭐 그리 화를 내며 다툴까 생각하다가도 작은 일에 전전긍긍하며 살아가야 하는 노부부의 숨가뿐 일상을 생각하니 아침잠이 훌쩍 달아나버렸다. 올해 서울에서의 자취생활을 정리하고 부산으로 주거지를 옮긴지 8년이 된다. 꽤 긴 시간 동안 나는, 노부부인 부모님과 두 명의 언니, 이렇게 다섯 식구가 머무는 오래된 5층 아파트에서 생활하고 있다. 조그마한 5층 아파트에서 내 생활공간은 언니와 함께 쓰는 작은 방을 정확히 ‘반’으로 나눈 공간이다. 이 ‘반’의 세계 속에 머물며 내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직장을 구하는 일이였다. 아침 일찍 벼룩신문을 획득하기위한 사투를 벌이고, 구직사이트를 매일 접속하는 일상이 몇 달째 반복되다 가까스로 홍삼을 파는 회사에 취직을 했다. 부지런히 일을 했고, 매달 받는 월급을 꼬박 꼬박 저축 했다. 그렇게 반복하기를 3년이 되던 해에 회사를 그만두었고 홍삼을 팔아 저축한 돈으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앞날에 대한 세 가지 그림을 떠올려보았다.

 

첫째, 작은 방을 정확히 ‘반’으로 나눈 생활공간에서 독립할 수 있는 자금으로 사용하는 것. 둘째,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미래를 위한 자금으로 묶어두는 것. 셋째, 자발적 백수를 자처하고 금전이 바닥날 때 까지 백수생활을 위한 자금으로 사용할 것. 그리하여 더 늦기 전에 인생에서 의미 있는 일을 찾아 나서는 것. 나는 몇 번의 고민 끝에 세 번째 삶의 방식을 선택했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사는 대로 생각하지 않고, 생각하는 대로 살아가는 삶-그 세계를 이론과 이념이 아니라 몸으로 만나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내 삶의 무늬는 조금씩 변해갔다. 사람들과 함께 책을 읽으며 공부를 하는 기쁨을 느꼈고, 창작하는 사람으로서 여러 가지 실험과 시도들을 마련하는 것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획일화된 사회적 구조와 제도권 바깥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삶(예술)을 스스로 꾸려나가는 예술가-동료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곁에서 보고 배울 수 있었다. 그렇게 직장을 구하지 않고 반 백수를 유지하는 예술가 유형으로 생활을 한지 현재로서 5년이 되어간다.

 

가끔 어떻게 그런 생활이 가능하냐고 묻는 이들이 있다. 사람들과 함께 공부를 하거나 작업하고 전시를 하는 일이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물질적인 생산기반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일반적인 사회 구조 안에서 쉽게 인정될 수 있는 활동들이 아니기에 정서적 불안함도 늘 함께 동반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오랜 시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내안의 불안과 함께 사는 법을 익혀나가고, 얻는 것만큼 잃어버릴 자리도 인정해나가는 일을 끊임없이 반복했기 때문이다. 정사각형을 정확히 ‘반’으로 나눈 내 방의 세계에서는 아직 자립하지 못했지만 나머지 ‘반’의 세계를 만들어가기 위한 자립은 홍삼 파는 일을 그만둠과 동시에 시작된 것이다. ‘반’과 ‘반’을 합친 삶(예술)이 ‘하나’가 되기 위해 애를 쓰기보다, ‘반’만이라도 지켜나갈 수 있는 삶(예술)이 귀한 일임을 지난 시간동안 배워왔다.

 

그런 어느 날 이였다. 오랫동안 지속해왔던 삶의 방식이 위태로워질지도 모른다는 감각이 나에게 찾아왔다. 거리위에 집들이 허물어지고, 작은 것들마저 빼앗아가는 세계, 그 속에서 절망하는 사람들, 그렇게 물속으로 침잠해가는 죽은 영혼들을 보며... 지난 시간 동안 선택한 삶의 방식 속에서 쌓아온 ‘반’의 세계가 얼마나 연약할 수 있는지 다시 그 자리들을 하나하나 더듬어 나갔다. 언제든지 쉽게 부서 버릴 수 있는 이 세계로부터, 최소한 ‘반’의 세계를 스스로 지켜나갈 수 있는 자립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자립이란 홍삼 팔아 저축한 돈으로 고민했던 자립은 아닐 것이다. 호기롭게 부모님의 곁을 떠나 혼자 무언가를 해결해나가며 사회인으로 성장해나가는 자립도 아닐 것이다. 또한 예술의 시장에서 소모되고 소비되는 예술가가 되기 위한 자립도 아닐 것이다. 제도권 안에서 누구나 알 수 있게 규격화될 수 있는 자립도 아닐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삶(예술)속에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지속하면서 쌓아온 작은 삶(예술)이, 이 세계 속에서 숨 쉴수 있도록 지켜나가고 싶은 마음이 빚어내는 자립. 새삼 그 자립이라는 삶(예술)의 터전을, 이 세계에서 구축하는 일이 얼마나 고된 노동일까 생각해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가는 작은 삶(예술)을 키워나가고 지켜나가는 사람들. 이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반’의 세계를 만드는 사람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예술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예술과 노동. 그 가치들이 설 수 있는 울타리가 예술의 생태계 안에 존재해야 하지 않겠는가.

떠밀리고 떠밀려서 어딘가로 사라지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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