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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보따리를 푸는 예술- 누군가를 위한 식탁

 

삼십년이라는 시간동안 내 살림을 꾸려본 것은 부산을 떠나 서울에서 머물렀던 5년 정도의 시간들이 전부이다. 지금까지 부모님과 언니 네 명이 함께 좁은 집에서 아옹다옹 부대끼며 지내왔다. 가족들과 함께 지내는 집에서 내가 가장 소홀했던 공간은 부엌이었다. 항상 어머니가 해주신 음식이 밥상에 차려지면 진희야 ‘밥 묵으라’라는 어머니의 말이 들려온다. 그때가 되어서야 나는 슬금슬금 방문을 열고 나와 밥을 먹는다. 어렸을 적부터 집보다는 바깥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스스로 찾아 나섰기에 상대적으로 일상생활을 돌보는 일에는 항상 서툴렀다. 그러다 보니 ‘밥 먹으라’는 어머니의 말 속에 담겨져 있는 것들은 모른채 하며 살아온 셈이다.

 

그런데 조금씩 생각의 변화가 시작되었다. 주변의 친구들이 생활에 쏟는 작은 노동이 나눔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대연동의 작은 집에서 시작해서 지금은 칠산동으로 옮긴<생각다방 산책극장>이라는 공간에서 만난 히요의 생활 모습이 나에게는 아주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한때 몸담았던 공동체 모임에서 관계를 만드는 작은 노동이나 돌봄이 비생산적인 노동으로 마모되는 것을 느꼈고 그 작은 노동의 가치가 늘 부정적인 것으로 귀결 되곤 했다. 그럼에도 공동체를 건사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작은 노동들을 기꺼이 할 수 있는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후로 나는 어떤 모임을 가던 앞에 나와서 이야기하는 사람보다묵묵히 일을 거드는 사람, 조용히 그 자리를 만드는 사람들을 눈여겨보았다. 그런 고민들 속에서 <생각다방 산책극장>의 히요의 생활노동은 아주 자연스럽게 사람들 사이에서 그 자리를 조용히 밝히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에서 식탁을 차린다는 것이 누군가를 품는 행위이며 그 작은 시간 속에 타인에 대한 이해나 배려의 마음이 같이 버무려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생활 속에서 만들어내는 노동의 리듬은 자신을 지키는 양생술이자 누군가에게 전해지는 살뜰한 손길이 될 수 있음을 가까운 동료의 삶속에서 배웠다. 내 곁에 스승 같은 동료들이 있어 내 어머니의 낮은 식탁을 다시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누군가를 살리고 돌보는 보살핌의 노동으로서의 식탁은 항상 문턱이 낮다. 낮기 때문에 품이 아주 넓다. 그러니 누구라도 만날 수 있고 누구라도 그곳에 있을 수 있다. 하나의 식탁이 차려진다는 것은 타인에 대한 배려와 작은 노동이라는 생활의 보따리를 풀어 나누는 것이다. 그렇게 ‘누군가를 위한 식탁은 시작되었다.’

 

달방에서 푼 식탁

건물과 건물 사이 작은 틈에 조그맣게 자리하는 달방들, 방안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듯 견뎌내고 있는 문고리, 창문 틀, 장판, 수도꼭지. 작고 연약하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것들을 돌보고자하는 마음처럼, 달방에서 첫 번째 <누군가를 위한 식탁>을 열었다. 이 식탁은 여러 사람들의 증여를 통해 차려졌다. 식탁을 함께하는 사람들은 나누어먹을 재료를 증여하고, 나는 식탁을 차리는 노동을 증여한다. 식탁에 모인 이들이 주고받는 나눔이 같이 살아가는 생활문화를 만들어낸다. 그 증여의 순환이 함께 차리는 자율적인 식탁을 가능하게 만들어준다

 

문학의 곳간에서 푼 식탁

생활의 증여로부터 자율적인 식탁이 차려지면 만남과 대화라는 새로운 문이 열린다. 생활의 각박한 리듬을 걷어내고 진득하게 마주보고 나눌 수 있는 대화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사귐을 가능하게 한다. 그렇게 두 번째 <누군가를 위한 식탁>은 생활예술모임 <곳간>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소설을 통해 만남의 문을 여는 <문학의 곳간>에서 열었다. 식탁이라는 낮은 문턱을 지지대 삼아 소설가 최은순 작가와 문학비평가 김선우씨가 함께 음식을 만들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옛날에 어머니들이 둘러앉아서 송편을 빚으며 이야기를 나누듯 우리는 주먹밥을 빚으며 서로의 안부와 생활 속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이날 함께 먹고 남은 재료인 쑥과 멸치, 된장은 최은순작가에게 증여했다. 다음날 오후쯤 최은순작가로부터 맛있게 끊인 쑥국의 사진과 점심식사에 초대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그렇게 만남의 물꼬가 연결되고 있었다.

 

모퉁이극장에서 푼 식탁

세 번째 식탁은 관객들을 응원하는 <모퉁이극장>에서 ‘관객들을 위한 식탁’이라는 이름으로 차려졌다. 올해 부산국제단편영화제에서 모퉁이관객리뷰단을 결성한 모퉁이극장에서는 ‘생활관객운동’으로 ‘관객영화 베스트 10’, ‘관객사인’처럼 관객들의 마음과 손때가 묻은 자료들을 모으고 있다. 모퉁이극장이 한사람 한사람의 관객들을 응원하는 마음을 곁에서 들여다보면서 모퉁이극장과 관객들의 매개로서의 식탁을 생각했다. ‘누군가’가 관객들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를 응원할 수 있는 식탁, 누군가를 돕는 식탁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생활 속에서 풀고 나누는 식탁

장소적인 의미로서의 식탁이 아니라 작은 생활 속 보따리를 풀 수 있는 관계로부터 마련된 식탁이야 말로 돕고 응원할 수 있는 식탁이다. 4월에 열린 생활예술가 히요의 <around>전시는 그녀의 생활의 자립을 선언하는 문맥과 연결되어 있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의 자립을 돕고 응원하기 위해 집에서 직접 만든 고추장을 메시지와 함께 건네주었다. 그 작은 보따리는 다시 델마와 은주로 구성된 팀 <한량맨션>에게로 건너갔다. 한량맨션의 애도기간을 함께 기원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은주작가에게 메시지를 담은 사과 하나를 건넸다. 식탁은 테이블처럼 무겁지 않다. 내 호주머니 속에도 식탁이 있다. 그러니 생활 속 작은 노동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관계의 현장, 삶의 현장으로 옮겨 다니면 그곳이 식탁이 되는 것이다.

 

다양한 예술 매체의 기본적인 틀을 활용해서 메시지(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작가의 전형적인 형식이고 예술의 방식이라면, 생활과 삶을 가꾸는 노동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즐거움, 나눔, 증여는 삶의 형식을 온몸으로 바꾸는 작업이다. 그러한 작업들이 다른 삶을 꿈꾸고 살아내고자 하는 의지이며, 예술이야말로 다른 삶을 제안하는 것이기에 점점 축소되고 마모되는 생활의 현장을 가꾸고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 어디서든지 보따리를 풀어서 나눌 수 있는 예술. 그 속에 만남과 사귐, 증여과 응원이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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