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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도착하지 않은-미래의 작가들에게

 

 

나는 2011년 한 대안 공간 단체전에 참여하게 되면서 미술의 장에 처음 발을 딛게 되었다. 그 이전까지는 시스템 바깥에서 독립적인 방식으로 영화와 사진작업을 해왔기 때문에 미술의 장의 분위기가 생소했다. 그 이유는 대안이라고 하지만 대학의 선후배 구조가 그대로 바깥에서 노출되어 다소 위계적인 분위기와 누군가는 소외되는 모습들, 전시를 마치고 작업에 대해서 수평적인 관계 속에서 이야기 할 수 있는 자리보다 공격적인 비평이나 무관심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들, 이와 같은 미술-예술의 환경들이 낯설게 다가왔다. 그러나 경험하지 않고 무언가를 판단할 수 없다는 생각에 나는 여러 기획 전시에 참여하면서 작업의 이력을 쌓으며, 동시에 이곳의 생태계-예술 환경에 대해서 스스로 감각하고 감지해나가는 시간을 가졌다.

 

그 이후로 여러 전시에 참여했지만 작업이 최종적으로 보여 지는 방식인 ‘전시’를 통해서 작가적 경험이 응집되기보다, 마모되어간다는 문제의식이 생겨났다. 그런 생각 속에서 2013년부터는 작업과 전시라는 포맷에 집중하기보다,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작가들이 모여 주체적인 방식의 예술 환경을 만들어가는 나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였다.(활동한 모임: 홍익맨션과 p904+)

 

또한 대안이라는 ‘상’자체가 이미 오염되었고, 대안이 하나의 제도나 시스템이 되어버리는 여러 사례들을 보면서 더 낮은 자리와 실천들을 꾀하며 생활예술모임 <곳간>이라는 팀을 만들어 생활 속에서의 나눔과 실천, 만남과 사귐이 예술의 현장이 되는 실험을 이어나가고 있다.

 

첫 대안 공간 전시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3년하고도 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여러 고민들 속에서 지금의 예술 현장에서 작업과 실험들을 하고 있음에도 나는 여전히 회의적이다. 그것은 개인적인 작가활동에 대한 고민은 아니다. 아직 이곳에 도착하지 않은-미래의 작가들이 딛게 될 예술- 환경에 희망을 감지하기가 여전히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작가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은 무엇이 있을까? 개인의 명성과 작가성에 대해 집중을 줄이는 일이다. 100%중에 60%가 자신에게 기울어져 있다면 40%는 누군가에게 내어줄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을 말한다. 내가 할 수 없는 것들, 혹은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 혹은 내가 여러번 했던 것들을 포기하고, 아직 기회를 얻지 못한 작가들, 이제 시작한 작가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양보하는 일이다.

 

작가란, 혹은 예술가란 작업으로만 말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작업 안에 모든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예술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때 가능하지 않을까. 내가 발을 딛고 서 환경과 조건들을 감지하며 물살을 타고 물살을 바꾸는 사람이다.

 

 

 

2014. 9. 21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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